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한의 핵개발 (문단 편집) === [[6자회담]]과 9.19 공동성명, [[1차 핵실험]] (2003 ~ 2007) === 1차 6자회담은 2003년 8월 27일부터 8월 29일까지 베이징에서 개최되었다. 애초에 타협할 생각조차 없이 벌인 회담은 당연히 상호비방만 난무한 채 결렬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예상과는 달리 중러가 북을 비호하면서 국제적 압박의 목적도 달성되지 못했다. 2차 회담은 2004년 2월에 열렸는데 역시 성과 없이 종료되었다. 곧 대선을 치러야 하는 공화당은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공화당은 2004년 카다피의 핵개발을 포기시켰던 방식을 북한에도 적용하려고 했다. 그래서 6월에 열린 3차 회담에[* [[이수혁(정치인)|이수혁]] 차관보 with 켈리 차관보/북측 김계관 외무성 부상, 왕이 부부장.] 서 리비아식 일괄 타결안을 제시하는데 결국 거부당한다. 물론 9.11 이후 미국의 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부시는 대통령 자리를 지켜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라크, 아프간에서 백주대낮에 폭탄이 펑펑 터져 수천명의 미국인이 계속 죽어가는 와중에 2005년 2월 10일에 핵보유 선언까지 해버린 김정일은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협상 전문가로 불리는 크리스토퍼 힐이 해결사로 등판하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정권초기에 대북특검을 추진하는 등 엄격한 상호주의를 추구했던 노무현 정부가 정동영 장관이 대북 송전을 제안하는 등 유화적인 조치를 취하니 약간의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래서 이때 라이스 국무장관이 북한을 주권국가로, 부시가 김정일을 Mr. 김정일로 호칭하는 이상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북이 6자회담 복귀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운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의 철회에 대한 미국의 화답이었다. 결국 2005년 7월 9일 북은 조선중앙TV를 통해 6자회담 재개에 합의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렇게 열린 4차회담에서 9.19 공동성명이 채택된다. 검증 가능한 북의 비핵화, 미국의 안전보장 약속, 비핵화 공동선언 준수, 적당한 시기[* 후일 이 조항 해석을 두고 북미간 갈등이 발생한다. 서로 불신하는 상황에서 각자의 조건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 이런 교착 상태에서 방코델타아시아 자금동결이 일어난 것이다.]에 경수로 제공, 북미 북일관계 정상화, 상호 주권 존중, 에너지 교역 및 투자 분야에서의 경제지원과 협력, 항구적 평화체제 모색, 행동 대 행동 원칙을 내용으로 했다. 제네바협약에 행동 대 행동 원칙을 명시했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방코델타아시아은행이 주요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문제가 되었다. 미국 재무부는 방코델타아시아은행에 금융제제를 1월부터 가하고 있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10130816251&code=910303|기사]] 이 때문에 2500만 달러의 북한계좌가 동결되었다. 미국의 제재는 당시 달러화위조와 돈세탁관련 의혹에서 비롯된 것으로, BDA에 국한된 것이었지만 미국의 눈치를 보던 다른 지역의 은행들도 북한과의 금융거래를 중단함으로써 북에 심대한 타격이 가해졌다. 이어서 미국은 8개 북한 기업에 대해서도 제재조치를 취한다. 북한은 이 동결을 풀어달라고 요청했으나 미국은 그 댓가로 핵포기를 요구했으며 이에 협상은 결렬되었다. 북은 벼랑끝 전술로서 고강도 도발을 감행한다. 먼저 2006년 미국 독립기념일인 7월 4일에 탄도미사일을 7기나 발사하나. 이번에는 위성발사라고 둘러대지도 않았다. 이 때 대포동 2호가 발사되었다. 노골적인 도발이었던 셈이다. 미사일 대량 발사를 제재하기 위해 안보리에서 1695호 결의가 채택되었다. 이로써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평화적 목적 발사도 포함하여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이어서 10월 9일에 북은 1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북한에서 그 동안 실행되었던 경제개혁조치가 잇다라 중단되고 친개혁적 관료([[박봉주]] 내각)들의 자리가 대거 강경파로 교체된다. 그러나 10월 11일 김정일은 6자회담에 복귀할 수 있다는 뜻을 비추어 보였다. 미국은 기존의 원칙을 바꿔 양자회동을 하여 6자회담 재개에 합의한다. 참고로 2006년 10월 9일 벌인 핵 폭발 실험에 의하면 핵의 위력은 0.5kT(중국에 사전 통보한 예상 핵실험 규모는 4kt이었다.)이다.[* 조선중앙통신사 보도를 통해 풍계리 핵실험장에서 핵 실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이날 오전 10시 35분께 [[함경북도]] 화대리 지역에서 진도 3.58에서 3.7 규모의 지진파를 감지했다.]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리틀보이가 '''15kT'''이다. 아주 단순히 계산해봐도 위력이 30배 이하. [[서울대]] 캠퍼스 하나도 다 못 날린다고 한다.[* 당시 미국 몇몇 언론에선 방사능이 검출되지 않았다느니 위력이 없다면서 사실은 다른 걸로 시늉만 내고 이걸 빌미로 뭔가 외교적 성과를 얻으려고 쇼한 게 아니냐는 분석 및 주장도 나온 바 있다.] 1차 핵실험에서 얻으려했던 4kt의 실험 결과를 뒤에서 보겠지만 2009년 5월 2차 실험 때 드디어 '3~4 kT 규모'로 진입하는데 성공하였다. 위력이 궁금하다면 [[원자폭탄]]의 위력을 참고할 것. 이렇게 발등의 불이 떨어지자 6자 회담은 급 진전된다[* 2007년 임기 말의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역시 순조롭게 [[2007 남북정상회담]]을 진행하여 성과를 내려던 노무현 정부의 합작품의 맥락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2006년 미국 총선에서 민주당이 하원을 가져간 효과도 있었다.] 2007년 5차 6자회담의 성과로 '2.13 합의([[외교통상부]] [[천영우]] 차관보 with 힐 차관보/김계관, 우다웨이)' 가 이루어졌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